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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얻은 정보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역사

이번 글에서는 세계 금융 역사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워털루 전투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정부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금화를 비밀리에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유럽 대륙에서 조달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18141월 영국 정부는 로스차일드에게 2개월을 시한으로 금화 60만 파운드를 조달하도록 극비리에 지시했습니다.

그해 5월 로스차일드는 120만 파운드의 금화를 영국 정부에 전달해 전비로 사용하도록 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탈리아의 엘바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18153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 대군을 만들었을 때도 나탄 로스차일드는 즉시 200만 파운드의 금화를 조달합니다.

또한 유럽의 동맹국으로부터 지원금 980만 파운드를 받아서 웰링턴 장군에게 이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영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는 한편, 국제적으로 활용 가능한 금화를 적기에 확보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영국은 경기 침체를 겪게 됩니다.

전쟁 기간 동안 전쟁 물자의 생산으로 경제가 활력을 찾고 철강과 섬유 산업이 발전했지만 그 수요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유럽 대륙이 철강이나 섬유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대폭 올리면서 영국은 수출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또한 프랑스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조달한 전비에 대해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 영국은 중산층에 대한 세금을 올렸습니다.

 

2. 로스차일드의 성공 요인은?

런던, 프랑크푸르트, 파리, 암스테르담의 하우스 운영과 이들 하우스 간의 연락 담당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형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국가별 가격 차이에서 발생한 이익, 재정거래로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금값이 런던보다 파리에서 더 높으면 파리에서 금을 팔아 채권을 사고, 이 채권으로 런던에서 금을 사고 다시 금을 파리에서 파는 방식으로 금과 채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서 돈을 법니다.

로스차일드 형제가 구축한 은행 간 네트워크는 성공적인 재정 거래와 금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로스차일드는 비둘기를 메신저로 활용하거나 영국 남부 도버 인근의 포크스톤에 밀사를 상주시켜 영국 외교관보다 먼저 정보를 런던에 전달했습니다.

심지어 영국의 외교관보다 정보를 10~12시간 빨리 파악하게 됩니다.

 

3. 워털루 전투 이후

전쟁으로 금화 수요가 높았지만 전쟁이 끝나면 금화 수요가 낮아지고 오히려 채권의 가격은 안정적으로 돌아옵니다.

 

로스차일드는 이 점을 이용해서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 금을 매각하고 채권에 엄청나게 투자해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1817년 하반기까지 로스차일드는 영국 정부채에 대한 투자를 계속했는데, 매각 완료 후 이익이 현재 가치 기준으로 6억 파운드에 이르렀습니다.

 

1825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총자산은 방크 드 프랑스와 베어링 은행의 자산 합계보다 9배 많은 수준이 이르렀고, 1836년 나탄 로스차일드가 사망할 때의 자산은 영국의 국민소득의 0.6%에 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