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빈 체제 이후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1850년대부터 186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돈이 부족한 나라들이 많았습니다.
1860년대까지 채무가 많은 국가 중 대표적인 국가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자금을 대는 은행은 개인은행이 대부분이었는데 대표적인 은행이 프랑크푸르트에 소재한 베트만방크였습니다.
베트만방크는 무역업을 겸해 은행업을 영위했는데 오스트리아 정부가 18세기 말 대출 원리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을 때 신규 자금을 조달해 도와주었습니다.
빈 체제 이후 그 역할은 로스차일드의 빈 하우스가 차지하게 됩니다.
1835년 로스차일드 빈 하우스의 설립자인 살로몬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빈 회의 의장인 메테르니히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의 부동산 취득을 허용하게 만들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가 재정 위기에 빠졌을 때 로스차일드가 자금을 마련해 위기에서 구해 준데 대한 상호주의 혜택이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금융으로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였습니다.
1830년 8월 벨기에가 네덜란드에서 독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프랑스는 언어와 종교가 같은 벨기에를 위해 대규모 지원을 했는데, 오스트리아가 군사 개입을 하려고 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제임스(파리)와 살로몬(빈)을 통해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리프와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 사이에 비공식 접촉으로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였습니다.
1831년 로스차일드가 오스트리아 정부에 5,700만 굴덴의 장기 자금을 주선하면서 향후 3개월 내 전쟁이 발생하면 대출금을 회수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조건)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이해관계가 매우 컸습니다.
1816년 살로몬 로스차일드가 빈에 오스트리아 최초 은행인 로스차일드은행을 설립했고, 그의 아들 안셈은 1855년에 크레디탄슈탈트를 설립하였습니다.
크레디탄슈탈트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은행이 되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제국의 철도, 광산 등의 개발 프로젝트에 금융을 지원하고 수상과 보헤미안 헝가리 귀족들의 자금줄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859년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를 더 이상 강대국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860년 3월 2억 굴덴 규모의 대출을 주선할 때 제임스 로스차일드는 적자에 허덕이는 오스트리아의 약점을 이용해 여러 가지 부대조건을 달아 외국 은행의 참여를 방해합니다.
로스차일드가 단독으로 거래를 맡지 않는다면 오스트리아는 금융시장에서 신뢰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로스차일드는 프랑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코자 추진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1852년에 설립된 크레디트 모빌리에를 시작으로 프랑스 정부가 자국 산업의 발전을 위해 만든 은행과 국민이 예치한 풍부한 예금이 산업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금융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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